세계지도에 그려진 한반도의 모습은 어떻게 바뀌어 왔을까?
독일 최고의 지도 제작자 발트제뮐러가 제작한 세계지도의 아시아 부분.
중국과 일본은 당당히 그려진 반면 한반도는 찾아볼 수 없다.
15세기까지 유럽의 세계 지도는 보잘것없었다
유럽에서 근대적 의미의 세계 지도는 헬레니즘시대의 위대한 천문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이 14세기 후반 유럽에서 발견되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유럽의 세계 지도는 ‘T-O형’ 세계 지도가 일반적이었는데, 이 세계 지도는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 인식이 철저히 반영된 종교적 성격의 지도였다. 예컨대 예루살렘이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거나,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일부와 근동아시아, 아프리카 북단 일부만이 실제 지형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도는 전체 세계에 대한 지리 정보를 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세계의 지리적 형세도 전혀 객관적으로 반영하지 않아 성지 순례와 같은 종교적 용도 외에는 거의 가치가 없었다. 유럽과 아프리카, 인도 지역까지 포함하는 우리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1402년 제작되던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세계 지도였다고 평가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000년 동안 완전히 잊혀졌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은 이러한 사정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14세기 말 콘스탄티노플 지역에서 그리이스어로 씌어진 『지리학』 일부가 발견된 이후 1409년에 『지리학』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인들에게 처음 알려졌다.
거기에 담긴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는 구형의 지구 형체를 잘 반영하는 과학적인 지도 투영법에 입각하고, 경도와 위도를 기준으로 지역의 정확한 위치를 지면 위에 그려 넣는 등 그때까지 그려진 종교적 성격의 ‘T-O형’ 세계 지도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이후 15세기 동안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작도법을 이용한 새로운 세계 지도들이 종교적 세계관과 융합하여 중세 지도학에서 벗어나는 변화가 일어나면서 근대 지도학의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신대륙 발견과 동아시아의 지리 정보
15세기 초 이후 프톨레마이오스의 작도법을 이용함으로써 세계 지도가 크게 발전했지만, 15세기 동안에는 세계 지리 정보가 제한되어 세계 전체에 대한 객관적인 지리 정보를 담은 세계 지도가 나오지 못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 자체가 유럽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콜럼버스가 대륙을 발견한 1492년이었다. 동아시아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있었지만 여전히 미지의 상태였다.
16세기 동안에는 이와 같은 지리 정보의 제약이 어느 정도 극복되고, 작도법에서도 한층 발전이 이루어진다. 큰 사건은 역시 콜럼버스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일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의 세계 지도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독일의 지도 제작자 발트제뮐러가 그린 1507년의 세계 지도에서였는데, 흔히 ‘아메리카 출생 증명서’로 불린다. 그런데 이 ‘출생 증명서’에서 신대륙의 이름이 아메리카로 붙여진 사연이 재밌다.
발트제뮐러는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이 ‘콜럼버스’가 아니라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co Vespucci)’라고 착각했다. 그 결과 출생 증명서에 새로이 발견된 대륙의 이름을 ‘아메리카’라고 적어 넣어, 결국 신대륙을 콜럼버스가 아닌 아메리카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신대륙이 세계 지도에 등장함으로써 전체 세계의 외형은 세계 지도로서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이와 같은 지리 정보의 확대와 함께 16세기 동안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작도법을 넘어서는 과학적 작도법의 발전이 있었다. 근대 지도학의 완성에 큰 기여를 한 지도 제작자 메르카토르와 오르텔스의 성과가 그것이었다. 메르카토르는 ‘정각 원통도법’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완성해 프톨레마이오스의 작도법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 기여했다. 오르텔스는 이러한 메르카토르의 새로운 과학적 작도법을 수용해 더 한층 완벽한 세계 지도를 완성했다. 1570년에 처음 나온 오르텔스의 지도책 『세계의 무대(Theatrum Orbis Terrarum)』는 1612년까지 31회나 수정판을 거듭 내며 전 유럽에 널리 보급될 만큼 큰 관심을 모았다.
오르텔스의 일본지도. 유럽의 지도에 한반도가 처음 등장한 시기의 지도로
한반도가 섬나라로 묘사된 것이 이채롭다.
한반도와 ‘코리아’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
중세적, 종교적 ‘T-O형’ 세계 지도에서 벗어나 신대륙의 지리 정보를 담고 과학적 작도법을 이용해 획기적으로 개선된 16세기에서 17세기 초 유럽의 세계 지도에서 동아시아, 특히 한반도는 어떻게 묘사되었을까.
한반도가 유럽의 세계 지도에 처음 등장한 것은 1590년대였다. 1595년 판 오르텔스의 세계 지도책 일본 부분을 보면 한반도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지도는 1590년대 일본에서 활약하던 예수회 신부가 보내 준 일본 지도를 입수한 오르텔스가 자신의 세계 지도책에 수록한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의 모양이 기다란 오이 모양으로 실제의 모양과 너무 다르다. 더구나 반도가 아니라 ‘섬나라 코레아’로 그려져 있다.
1595년판 오르텔스의 지도 이전에 유럽의 세계 지도 어느 것에서도 한반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유럽인들이 한반도와 코리아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일찍이 13세기에 원나라를 방문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 선교사 루브룩의 윌리엄이 교황에게 제출한 보고서에는 ‘코리아(보고서엔 카울레Caule로 씌어짐)’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코리아는 ‘바다 한가운데의 섬나라’로서,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나이가 그대로 멈춰 더 이상 늙지 않는’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로 묘사되었다. 이와 같이 코리아는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신비의 세계였기 때문에 유럽의 지도 제작자는 세계 지도에 수록하지 않았고, 1590년대에 그 존재를 확인한 오르텔스에 의해서 처음 섬나라로 묘사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섬나라로 묘사된 한반도의 모습은 17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예수회 선교사 마르티니와 네덜란드의 지도 제작자 블라외가 공동 제작한 중국지도.
한반도가 자루 모양의 반도로 묘사된 최초의 지도이다.
비로소 반도의 모양을 갖추다
한반도가 처음 섬나라에서 벗어나 반도로 그려진 것은 오르텔스의 지도 이후 60년이나 지난 1655년경이었다. 바로 17세기 전반 네덜란드 출신의 유럽 최고의 지도 제작자 블라외가 만든 세계 지도에서였다. 모두 207개에 달하는 지역의 지도와 세계 지도를 수록한 블라외의 세계 지도책 초판이 나온 것은 1635년이었는데, 초판에서만 해도 한반도는 여전히 섬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1655년 판에 와서 뚜렷한 반도의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한반도가 반도의 모양을 갖추게 된 데에는 예수회 선교사 마르티니의 역할이 컸다. 그는 1643년부터 1650년까지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벌이면서 중국 지리에 대한 정보를 꽤 많이 획득한 듯하다. 그는 중국에 머물면서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나 알레니의 〈만국전도〉를 보았을 것이다. 또 중국인 나홍선이 그린 〈조선도〉도 구해 보았다고 한다. 이 지도들을 직접 본 마르티니는 한반도의 모양이 유럽의 지도들에서 묘사된 것과 달리 분명한 모양의 반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마르티니는 이와 같은 동아시아의 지리 정보를 가지고 1650년 중국을 떠나 1653년 유럽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당시 최고의 지도 제작자 블라외와 공동 작업으로 중국 지도를 제작하는 데 착수했다. 이때 제작된 중국 지도책에는 17개의 상세한 중국 지도가 담겼는데, 이 내용이 블라외의 1655년 판 수정본 세계 지도책에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서양식 세계 지도 제작
이러한 획기적인 변화가 유럽의 세계 지도에서 일어나고 있을 때 중국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을까? 그것은 유럽에서의 변화 이상으로 혁명적이었고, 그 변화의 핵에 선교를 위해 중국에 들어와 활동하던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1602), 알레니의 〈만국전도〉(1623), 페르비스트의 〈곤여전도〉(1674)를 들 수 있다.
〈곤여만국전도〉와 〈만국전도〉는 하나의 타원으로 전 세계를 그린 세계 지도이다. 이에 비해 〈곤여전도〉는 두 개의 원 안에 구대륙과 신대륙을 나누어 그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세계 지도의 중심이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가 되도록 그렸다는 점이다. 즉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의 왼쪽에 그리지 않고 태평양 오른쪽에 그림으로써 아시아, 특히 중국이 세계의 중심에 오도록 그렸던 것이다. 제작자와 독자의 시각에 따라 세계의 모습이 달라지는 ‘당연한 사실’을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앞 장에서도 얘기했다시피, 동아시아의 시각으로 세계의 지형이 바뀌어 묘사되었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생소한 내용은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에게 대단한 지적 충격을 주었다. 중국 대륙과 그 주변 인접국들만을 세계로 알고 있던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서양식 세계 지도가 보여 준 세계는 그야말로 광대한 것이었다. 서양 선교사가 제작한 세계 지도에 그려진 ‘과거의 세계’는 아주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세계는 더없이 넓어졌는데, 그 미지의 세계 대부분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도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또 인간이 살고 있는 땅이 둥그런 공과 같은 모양으로 그려졌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다. 왼쪽 끝과 오른쪽 끝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땅의 반대편에서 서로 만났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밑에 천장에 매달리듯이 거꾸로 서서 사는 세상이 있어야 했다. 상식적인 이성을 지닌 동아시아의 사람이라면, 천장에 매달리듯이 지구 밑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제정신으로 믿을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믿기 어렵고 그래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 선교사들이 제작한 세계 지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대부들은 극히 적었다. 다만 그때까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넓은 세상이 존재하고, 그중에는 믿을 수 있는 지리 정보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 그리고 전혀 모르는 광대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 등의 차원에서 서양식 세계 지도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그러한 호기심 어린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어서 목판으로 제작한 인쇄본이 모자라자 필사되어 널리 보급될 정도였다.
서양식 세계 지도의 조선 전래와 제작
서양식 세계 지도에 대한 식자층의 관심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가장 먼저 접한 것은 〈곤여만국전도〉였다. 1603년 사신으로 북경에 다녀온 이광정과 권희가 들여왔는데, 당시 홍문관의 책임자 이수광이 술회하듯이 〈곤여만국전도〉를 접한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 충격과 당혹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때 들여온 〈곤여만국전도〉가 현존하지 않아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원본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후에도 〈곤여만국전도〉는 여러 가지 형태로 전래된 듯하다. 예컨대 대형 병풍으로 제작되어 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운 것과 달리 책자에 삽입되어 간략하게 그려진 세계 지도들이 『삼재도회』나 『도서편』 같은 백과전서적 문헌에 삽입되어 전래되었다. 아마도 많은 사대부들이 이러한 문헌에 삽입된 마테오 리치의 간략한 세계 지도를 접했을 것이다.
한편 현재 규장각에는 8폭 병풍의 커다란 〈곤여만국전도〉가 남아 있다. 이 규장각본은 1708년 숙종의 명에 따라 관상감에서 제작한 것이다. 원래 6폭 병풍이었던 마테오 리치의 원본을 중국에서 모사하면서 여백에 동물들과 선박들을 그려 넣어 제작한 듯하다. 그런데 조선의 관상감에서 이것을 다시 모사 제작한 규장각본은 중국본과 달리 설명문을 좌우 두 개의 폭에 담아 8폭으로 만들었고, 그에 따라 크기도 172×531cm로 더욱 커졌다. 설명문에는 당시 책임자 최석정의 서문도 포함되어 있어 제작 과정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것을 통해서 마테오 리치의 원본 여백에다 기괴한 동물이나 탐험선으로 추정되는 선박들을 그려 넣은 〈(회입)곤여만국전도〉 판본이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에서는 여러 차례 서양식 세계 지도들이 전래되었고, 그것을 토대로 모사 제작되었다. 1623년에 제작된 알레니의 〈만국전도〉는 1630년에 정두원이 북경에서 사신행으로 다녀오면서 들여왔다. 물론 이때 들여온 〈만국전도〉의 소재는 알 수 없지만 후대에 이것을 모사한 것이 전한다. 정조 때의 관찬 지도집인 『여지도』에 수록된 〈천하도지도〉가 그것이다.
두 개의 원으로 나누어 세계를 그린 페르비스트의 〈곤여전도〉도 조선에 전래되었다. 1674년에 제작된 〈곤여전도〉는 1721년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온 유척기가 들여왔다. 현재 〈곤여전도〉는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에 8폭 병풍으로 제작된 것이 남아 있고, 규장각에는 설명부를 제외한 지도 부분 6개의 목판이 남아 있다. 이것은 1674년에 제작된 원본은 아니며, 1856년의 중국 광동 판을 바탕으로 조선에서 다시 제작한 것이다.
1830년대 김정호가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전도. 지도의 윤곽과 지리 정보는
서양식 세계지도를 참고했지만 그 틀은 전통세계지도 방식으로 변용되었다.
19세기의 보급형 서양식 세계 지도
서양식 세계 지도를 접한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것에 담긴 지리 정보에 대해서 처음에는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믿게 된 듯하다. 적어도 구형의 지구 형체에 대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동아시아 지역을 벗어난 광대한 지역의 지리 정보에 대해서는 점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사정을 19세기에 제작되어 널리 보급된 중소 규모 크기의 세계 지도에서 잘 알 수 있다.
먼저 1834년에 최한기가 제작한 〈지구전후도〉를 들 수 있다. 이것은 1800년에 중국의 장정부가 제작한 〈지구전후도〉를 토대로 목판에 새긴 것이다. 최한기가 지도를 그리고 목판에 새기는 작업은 〈대동여지도〉로 유명한 김정호가 맡았다고 한다. 크기도 42×88cm 정도로 휴대하기에 전혀 불편하지 않은 크기이다. 현재 이 목판 인쇄본들이 전국의 수많은 도서관과 박물관, 개인 서가에 소장되어 있다. 아마도 수량으로 보면 가장 많은 세계 지도일 것이다. 그만큼 많이 보급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또한 이에 못지않게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여지전도〉이다. 85.5×59cm의 크기로 액자로 만들기에 좋고, 휴대하기에도 불편하지 않은 크기이다. 이 지도 역시 김정호가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언뜻 보아 서양식 세계 지도 같지 않은데, 여느 서양 세계 지도와 달리 네모난 지면 위에 아메리카 대륙을 제외한 구대륙만이 그려져 있다. 눈썰미가 어두운 사람은 전통 세계 지도로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도의 윤곽이 장정부의 〈지구도〉를 토대로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와 동아시아 지역이 장정부의 세계 지도보다 훨씬 과장되게 그려져 있다. 마치 과거 전통 세계 지도에서 동아시아 지역과 한반도가 과장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문중양 교수의 우리역사 과학기행」(동아시아 펴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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