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게 용기를 입혀준 한국의 잔다르크 유관순 열사
"여러분! 우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하고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에게 갖은 학대와 모욕을 가했습니다. 10년 동안 우리는 나라가 없는 백성이 되어 온갖 압제에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 다같이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되찾읍시다!"
일제 강점기인 1919년 4월 1일, 유관순이 장터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한 연설이다. 일제시대 대표적인 여성 유관순. 가녀린 여성의 몸으로 일제란 큰 산에 저항해 나라의 독립을 울부짖음으로써 일본인 사학자 가타노 쓰기오는 ‘유관순은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평가한 바 있다.
왜 3.1 운동에 참여했나
1902년 충청도 천안에서 출생한 유관순은 장학생으로 서울의 이화학당에 입학해 신식학문을 배우면서 애국정신을 길렀다. 정동 제일교회에 다닐 때에도 매일같이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기도했다고 한다. 만세시위가 벌어지자 뒷담을 넘어서 다른 5명의 특별시위결사대와 함께 시위행렬에 참가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런 유관순이 3.1 운동에 참여한 것은 당연했다.
한편, 3.1 운동의 여파로 학교가 휴교하자 유관순은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간다. 이곳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한 유관순은 주변 어른들에게 만세시위에 대해 알리고 시위를 벌여야 한다고 설득하여 참여하게 만든다. 만세시위 일정이 1919년 4월 1일로 잡히자 유관순은 경찰의 눈을 피해 주변을 돌며 시위 참가를 독려했다. 시위 당시 일제는 군대를 동원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 만세시위가 진행되던 곳은 피와 주검으로 아수라장이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고 유관순은 주모자로 지목돼 체포되고 만다.
그러나 체포돼 옮겨지는 과정에서도 사람들이 모인 곳을 지날 때면 으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곤 했다고 한다. 대한독립을 위한 열정이 얼마나 간절한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일제는 더 지독한 고문을 가했지만, 유관순의 충절과 애국심을 신체적 고통으론 꺾을 수 없었다. 3.1 만세운동의 불길 속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가슴 속에서 누구보다 밝고도 처절한 불꽃을 피운 것이다. 그리하여 18세, 꽃다운 나이에 조국의 해방을 위해 항거하다 숨진 ‘조선의 잔다르크’로서 우리 기억 속에 살아있다.
현재 우리에게 유관순의 의미
첫째, 유관순 열사는 시대를 앞서간 인물로 당시의 시대적 관념을 타파한 인물이다. 당시의 가부장적 사회에선 모든 사회참여활동은 전적으로 남성의 몫이었다. 여성에겐 수동적 역할만 부여됐으나 유관순은 이 고정관념을 타파해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연약한 육신이 일제의 물리력에 100% 갇혀있는 상황에서도 저항을 지속했다. 역사상 유관순이야말로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진 '용기'의 옷을 남성에게서 벗겨내 여성에게 입혀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남녀평등의 현대사회에서는 여성의 사회참여가 급증하면서 사회 전역에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즉, 여성은 무조건 수동적이고 보조적 위치에 만족해야 했던 과거와는 모든 게 판이하게 달라진 것. 세심한 배려와 헌신적인 봉사정신을 모토로 하는 21세기 리더십은 남성보다는 여성에 유리한 국면으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제 맨 몸으로 일제의 총칼 앞에 항거한 유관순 열사의 모습만 강조할 게 아니라 현대여성이 필요로 하는 열사의 이면 발굴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